이름, 나이, 직업은 나인 것 같으면서도 내가 아니다.
이 바뀔 수 있는 기본족인 요소들은 결코 나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나의 존재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존재라는 것은 무엇일까?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은 아고타 크리스토프가
5년에 걸쳐 쓴 소설로 커다란 노트 (Le Grand Cahier, 1986), 증거(La Preuve, 1988), 세 번째 거짓말 (Le Troisieme Mensonge, 1991)라는 세 권의 책으로 출판되었으나,
한국에 들어오면서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제목으로 재탄생하였다.
작가의 의도가 존재에 대해 얘기를 하고자 했는지는 의문이지만, 이 책에 '존재'를 투영 시켜 생각해볼 만하다.
이 책 표지에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이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철학자로서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세계”가 담겨있다고 했다.
추측건대, 그가 말한 이상적인 세계는 조건 없는 보살핌이 가득한 세상일 것이다.
형제가 신부를, 언청이를, 언청이의 엄마를 보살피고,
루카스가 마티아스를 조건 없이 보살피는 것처럼 말이다.
분명 우리 사는 세계에 주위만 둘러봐도
조건 없는 보살핌이라는 것은 존재한다.
부모님은 나를 조건 없이 보살피고 있고,
나도 내가 기르는 고양이를 조건 없이 보살피고 사랑하고 있다.
주변만 둘러봐도 내 친구들은 힘들 때 함께 옆에 있어 주고
오히려 손 내미는 것을 개의치 않아 한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지키고 보살핌을 허락한다는 행위가
한 사람의 인생에서 상대에게 특정한 역할을 주는 것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중요한 역할이 되는 순간 나의 존재가 증명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내가 나를 알 수 없으며, 내 이름, 직업, 나이 등은 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그러나 누군가가 나의 존재를 인정해 준다면,
그때부터 그 사람의 인생에 ‘나’는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왜 태어났는지 알 수 없는 이 세상에서
역할이라는 것을 부여받음으로써
‘여기 있어도 된다’는 암묵적인 메시지를 받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실체가 불분명한 나의 존재는 보살핌이라는
상호작용을 통해서 완성돼가는 것일 수 있다.
어디에서도 있을 수 없었던 루카스가.
자신이 원했던 것을 그려가듯이 말이다.
'* 집사의 사생활 > -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록수 - 심훈 #남녀 간의 사랑을 곁들인 농촌계몽운동 소설 (0) | 2020.11.04 |
---|---|
거미여인의 키스 - 마누엘 푸익 #동성애 (0) | 2020.10.24 |
에디의 끝 -에두아르 루이 #프랑스의 민낯 (0) | 2020.10.04 |
고도를 기다리며 - 사뮈엘 베케트 #고도는 무엇인가 (0) | 2020.09.30 |
파리대왕 - 윌리엄 골딩 #성선설일까 성악설일까 (1) | 2020.09.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