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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사의 사생활/- 독서

에디의 끝 -에두아르 루이 #프랑스의 민낯

에디의 끝 - 에두아르 루이


왜? 난 사내앤데.
왜 나는 진짜배기 사내애가 아닌걸까?

스마트 전자도서관에서 인기도서 목록으로 꼽혀있던 책이다.
아주 잘 만났다 싶었던 책.

이 책은 작가의 회고록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이 자란 마을과
마을 사람들의 사상을 고발한다.

그 마을은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이 나뉜다.
힘 있는 자는 힘없는 자를 폭력으로 다스린다.
수컷다움이 자랑인 남자는 여자를 때릴 수 있다.
여자는 남자의 수컷다움을 자랑스러워한다.
여자답지 않은 것도 자랑스러워한다.

그들은 가질 수 없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병원에 갈 돈이 없으니까 의학을 믿지 않는다.
부르주아의 교양을 가질 수 없으니까
갖지 않는 마냥 혐오한다.
일말의 지혜 따윈 없다.
배울 의지도 없다.
그리고 가난은 배울 기회도 앗아간다.


가난과 무지는 대물림된다.


이러한 마을에서 에두아르 벨괼은
여성적 성향을 지닌 남성으로 태어나 자랐다.
호모새끼, 톳쟁이, 비역쟁이라 불리고
부모조차 그의 여성스러움을 수치스러워하는 환경 속에서
정체성을 부정당하고
폭력과 멸시로 얼룩진 유년시절을 보낸다.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폭력과
적나라한 표현이 수치와 모욕감을 전달하고,
에두아르가 받은 상처들이 강하게 잔상을 남긴다.

이 이야기가 60년대도 아닌 21세기에 벌어진 일들이며
프랑스가 배경이라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그러면서도 강렬한 기시감이 느껴졌던 이유는
내가 아는 그 동네도 에두아르가 살던 동네와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편은 아내를 때리고, 일 하지 않으면서 술에 자신을 담근다.
여자는 맞고 일하고, 남편을 먹여 살리면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나와 같지 않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무례한 말도 걱정이라는 포장 하에 공격적으로 던진다.
자신의 고집은 진리다.
또, 그들은 폭력스러움과 성격의 더러움을
‘세다’는 강함으로 간주하여 자랑스럽게 여긴다.
몰상식을 일탈로 여기며 무용담처럼 얘기한다.

그들은 왜 그럴까?
내 생각도 작가의 생각과 일치한다.
무지와 가난은 이런 마을을 만든다.

부모가 보여주는 세상이 전부인 아이들은
다른 사상을 배울 기회가 없고
다른 세상이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가난은 꿈을 꾸지 못하도록
지속적으로 패배감을 주는 환경을 제공한다.
그런 환경이 대물림되면서 그 마을 문화처럼 굳어진다.

폭력이 일상이기에 인간이 인간에게 휘두르는 폭력조차
폭력인 줄 인지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하물며 동물에게 휘두르는 폭력을 금지하는
동물 보호나 생명 존중의 개념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옮긴이의 말 중-

상처 받고 그대로 담습 할 아이들이 가엽다.

더 이상 아이들이 상처 받고 자라지 않도록
국가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없을까?

내가 아는 부르주아들은 이런 마을이 있다는 얘기를 하면
반은 믿지 않거나 놀라기만 한다.
이런 세상이 도처에 있다는 걸 정말 모르는 눈치다.
그래서 이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 책을 많은 부르주아가 읽었으면 한다.

제2의, 제3의 어린 에두아르가 생기지 않도록.
성인도 감당하기 힘든 폭력을
아이들이 감당할 필요가 없도록.
가난과 사상이 아이들의 꿈을 짓밟지 않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