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자체가 매력적이었던 것은 '밤', '으로의', '여로'라는 단어가 서정적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제목만 보기엔 긴 여로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아름다운, 동화 같은 이야기인 것 같지만
이 책은 유진 오닐의 비극적인 가족사가 담긴 자전적 성격의 희곡이다.
남편 티론이 아내 메리를 껴안으며 시작하는 이 책은 빛이 스며드는 아침에 시작해
애증으로 얽힌, 어두운 가족사가 하나씩 드러나는 과정을 거쳐 어두컴컴한 밤으로 마무리된다.
자식의 생명보다 돈이 중요했던 아버지 티론, 지나간 행복했던 과거만 그리며 모르핀에 찌들어 사는 어머니 메리,
열등감으로 둘러싸인, 이룬 것 없이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형 제이미, 그리고 다른 자식의 대체품처럼 여겨지며, 이 모든 것을 견뎌야 했던 유진 오닐 자신인 에드먼드.
부모인 티론과 메리.
두 사람이 결혼하면서 이 불행이 시작된다.
사랑받고 자랐던 19살. 수녀를 꿈꾸던 메리가 흥행 배우인 티론과 사랑에 빠졌고,
행복한 가정을 꿈꾸며 결혼생활을 시작했지만 결혼생활은 그녀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매일 밤마다 술에 절어 들어오는 남편을 맞이해야했고, 정착할 곳 없이 싸구려 호텔을 전전하며
아이들을 낳아 길렀는데, 홍역에 걸린, 당시 7세였던 첫째 아들 제이미가 영아였던 둘째 아이에게 병을 옮기면서 자식이 죽는 고통을 겪어야했다.
메리는 제이미가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라서가 아니라, 영악한 마음으로 일부러 병을 옮긴 것이라 확신하며
자식을 향한 증오의 감정을 키워갔다.
그리고 찬란했던 과거로, 안갯속으로, 모르핀속으로 절망 가득한 현실에서 도망치고자 한다.
"안개는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가려주고 세상을 우리로부터 가려주지. 그래서 안개가 끼면 모든 게 변한 것 같고 예전 그대로인 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야. 아무도 우리를 찾아내거나 손을 대지 못하지."
죽은 둘째 아들의 대체품처럼 낳은 에드먼드는
어렸을 때부터 병약했다. 소설이 시작하는 1장에서부터 간헐적으로 기침을 한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아슬아슬한 줄타기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은,
에드먼드가 폐병인 것을 온 가족이 인지하면서도 애써 부정하려고 하는데서 오는 데서 느껴졌다.
에드먼드의 병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지만, 가족 모두 내심 죽음을 확신하고 있는 눈치다.
그래서 아버지 티론은 땅은 빚을 내서라도 쉴 틈 없이 사들이면서, 폐병이 걸린 아들을 돈이 들지 않는 국립 요양소로 보내려고 하며, 형 제이미는 동생에게 네가 성공하는 게 싫었고, 일부러 건달로 만들려고 실패를 멋처럼 보이게 했다는
이제서야 실로 진심어린 고백을 한다.
티론이 최악의 가장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그도 들여다보면 딱한 구석이 있다.
어려서부터 그의 가족은 아버지에 버림을 받았고, 낯선 이국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했다.
기계 공장에서 하루 열두 시간씩 일하면서 서류철을 만들며 주급 50센트를 벌었던
헐벗고 굶주리며 살아 온 지난날이 그의 발목을 놓지 않고 있었다.
"갑자기 운이 바뀌어 가진 걸 다 잃게 될까 봐 항상 두려웠어.
그래도 땅은 많이 가질수록 안심이 되거든."
이 책을 읽으면서 지난날의 내 가족이 떠올랐다.
나도 누가 보면 못지않은 가족사를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내 부모를 사람으로서 이해하지만,
한때는 용서할 수 없는 마음에 분노가 서려 유진 오닐처럼
때로는 고통에 찬 눈빛으로, 때로는 통곡하여 새빨개진 눈으로
아무도 보지 못할 글을 써 내려가곤 했다.
작가와 비슷한 경험으로 고통을 이해하면서도
덤덤하게 읽어내려갈 수 있었던 건
이제는 지나가버린 감정이었기 때문일 거다.
나의 경우는 '부모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성인'임을 충분히 인지하면서 고통에서 해방됐다.
여전히 나의 인격의 일부엔 부모의 영향이 있지만,
그때마다 '난 성인이야. 벗어날 수 있어'라는 말을 곱씹곤 한다.
그리고 때로는 여전히 영향력을 끼치려 하는 부모에게
착한 딸을 포기하므로 내게 나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도록 방어한다.
유진 오닐은 이 책을 집필하면서 고통에 찬 모습으로 이 책을 집필했다고 한다.
그는 이 책을 써 내려가면서 정말로 가족을 용서했을까?
이제는 휴식과 같은 편안한 밤을 맞기 위해
용서하지 못했던, 그리고 곱씹을 수밖에 없었던 그들을 이해하는 긴 여로를 끝마치며...
그곳에선 부디 안녕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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