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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묘일기

고양이를 다른 곳에 보내라는 말 -3. 끝- #유기와 파양의 비참한 삶

시골은 병해충이 들끓는 곳이다.

 

산 속 모기는 아주 드세고, 한 번 붙으면 털어내도 떨어져 나갈 줄 모른다.

아스팔트가 없는 흙밭은 금방 이름 모를 풀떼기들이 자라나고

조금만 뒤져보면 벼룩, 진드기 같은 것이 득실거린다.

 

이런 환경에서 밖에서 자라는 강아지들이 병해충을 피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는 풍산이 등에 진드기를 떼어내기 위해 별 방법을 다 써봤다.

약이라는 약은 죄다가 사다가 발라보고 먹여보고 했는데,

늘 풍산이 몸엔 진드기가 드글드글했다.

 

모기 한 방에만 물려도 그렇게 가렵던데,

우리 풍산이는 그걸 어떻게 견뎌낼 수 있을까.

 

그나마 효과가 있었던 것은 진드기 주사였다.

근데 이게 독해서 하루 맞으면 몽롱해서 기운을 못차리고 누워있는거였다.

그런 모습을 볼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아직도 풍산이를 떠올리면 미안함과 죄책감이 한 세트처럼 따라온다.

 

 

너부리는 다행히 그렇게 오랜 기간 약을 먹인 적도 없는데,

더러운거 피해 다니고 워낙 깔끔떨고 벌레 싫어하는 애라서

사상충도 없었고 진드기가 바글바글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너부리도 병해충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눈에 요충이 있던거다.

 

병원에 데려가서 마취하고 요충을 꺼냈다.

그리고 마취가 풀리도록 하룻동안 동생 집에 두고 재웠다.

그리고 본가에 데려와서

아빠가 집안에서 너부리가 있도록 유일하게 허락해주는 장소인 신발장에 너부리를 들여놓았다.

 

투명한 현관문으로 너부리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게 그렇게 가슴에 남을지 모르고.

 

언니가 다음에 올때 산책시켜줄게. 

아프지마 알겠지?

그게 마지막일지도 모르고 자취방으로 돌아갔다.

 

 

 

그 날이 12월 31일이었다.

 

 

 

새벽에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부리가 들어오지 않아. 애가 어떻게 된 것 같아.

10년을 집 못찾아 오던 아이가 아니였는데.

 

 

나는 이상한 예감이 번뜩 들었다.

첫차를 타고 시골로 올라갔다.

동생 차를 끌고 동생과 동네 곳곳을 돌아다니며 전단지를 붙였다.

너부리야. 집에 가자.

우리는 울음섞인 목소리로 동네방네 외치고 다녔다.

 

어딘가에서 배고프고

가족을 기다리고 있을 그 마음을 생각하니

찾는 것을 멈출수 없었다.

 

그렇게 몇 개월을 찾아다녔다.

 

차에 치인 건 아닐까,

모든 도로를 찾아보았다.

길고양이들이 치여 죽은 잔해를 보면 지나치지 못하고

차를 세우고, 버스 타고 있던 중간에 내리면서

잔해를 확인하러 다녔다.

시청, 환경미화원, 유기견 보호센터에 전화하고

혹시 이렇게 생긴 강아지 크기는 이런데

치우거나 보셨냐.

지금쯤은 보셨냐.

얼마전에 전화했던 사람인데 혹시 그 사이에 보셨냐.

하면서 직원들을 괴롭히기도 했다.

 

 

보신탕집이 많은데

개장수가 데려간 건 아닐까?

우리 지역에 있는 모든 보신탕집을 검색했다.

보신탕집에서는 개를 기르지 않고, 개농장에서 데려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동네 사람들한테 수소문해서

개농장이란 개농장은 다 찾아다녔다.

 

 

그때 나는 세상의 실체를 보았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컨테이너 박스 안 철장안에 가둬두고,

꼬리는 두려움에 떨어서 다리사이로 숨기고

짖고 낑낑대던 개들... 그리고 그 바로 옆 철장에 두려움에 떨던 토끼 두 마리.

 

어느 집 마당엔 자신을 잡아먹을 줄도 모르고 꼬리를 흔들면서

밥을 먹고 짖어대고, 눈꼽으로 두 눈은 더러워져있고, 어딘가 다쳐있던 강아지들..

그리고 신고할까 봐 경계하며 그런 개는 여기 없다며 내쫓던 할머니들.

 

 

사설 유기견 센터에서 데려간 것은 아닐까?

 

"유기된 개가 넘쳐나서

새로운 개는 안받아요."

 

곳곳마다 전화해도 들리는 대답은 같았다.

 

그래서 자원봉사를 통해 사설 유기견 센터에 들어갔다.

오물에 뒤덮인 바닥과

그 바닥을 밟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사람에 대한 경계심만 강하던 애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좋아서 꼬리 흔드는 강아지들..

 

 

그리고 손과 발이 부러지거나, 어딘가 심하게 다친.

학대를 받아 함께 센터에 사진이 올라온 그 아이들은.

아직도 내 기억을 강하게 때리던 것은

다섯마리의 강아지가 살과 가죽이 분리되어 있던 사진이다.

 

 

 

 

저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빛 한 점 볼 수 없고,

오로지 밥만 먹고, 즐거움이란 없는 저 인생은.

 

자신의 안전을 위협받는 저 인생은.

 

어느날 따순 곳에 몸을 뉘이다가,

한순간에 나락에 빠진 듯

오물에 몸을 뉘일 수 밖에 없는 처지의 저 인생은.

 

바라는 건 오직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하는 것 뿐인데,

이 넓은 땅덩어리에 작은 덩치로 찾으려해도 찾을 수 없고

그리워만하다 남은 여생을 보내야하는 저 인생은.

 

말 못하는 짐승이란 이유로.

자신의 신경에 거슬렸다는 이유로.구타, 학대의 고통을 겪고도억울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저 인생은.억울한 일을 당해도보호해주는 작은 울타리 조차도 없는 저 인생은.

 

 

 

그러한 인생을 당신이 살게된다면.

당신은 그 인생을 견딜 수 있겠는가.

 

 

 

결국 주말마다 내려가

그 처량한 세상을 보면서도

찾을 수 있을거라는 기대가 일었지만,

그 기대는 늘 좌절되었다.

 

 

결국 나는 너부리를 찾지 못했다.

 

 

한동안은 집에 갈 수 없었다.

너부리가 마중나오던 그 길을 걸으면

눈물을 쏟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리고 확실히 인지했다.

 

 

이것은 우리의 죄다.

 

 

나의 죄책감은 어느새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었다.

 

그래서 이 죄를 내 팔뚝에 새겼다.

 

너부리, 풍산이,

아쿠, 마린.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며 낙인을 찍은 것이다.

 

 

 

언제나 그 죄를 잊지말자고.

그리고 남은 아이들을 위한

내 책임의 무게를 잊지말자고.

 

 

일 년 뒤, 풍산이도 12년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빠가 포크레인으로 땅을 파서 가문 사당 뒷 쪽에 묻어주었다.

그리고 우리 집은 개를 다신 들이지 않기로 했다.

 

주인 없는 풍산이 집을 바라볼 때마다

미안함과 죄책감이 나를 짓누르고 있음을 느꼈다.

 

 

내가 이런 일을 겪어왔는데,

어떻게 다른 곳으로 우리 애들을 보낼 수 있겠는가.

 

 

 

 

나에게 반려동물이란 사랑이지만 아픔이자, 나의 죄이자, 책임이다.

 

 

내가 보여주는 세계가 전부일 우리 아쿠 마린이.

나는 아쿠 마린이 뒤에

바둑이, 풍산이, 너부리, 그리고 스쳐갔던 강아지들을 본다.

 

그들에게 해주지 못했던 것들을 해주고,

다시는 죄를 반복하지 않을 것임을 다짐하고 다짐하면서...